국내 최초로 창원 성산패총이 발견되어 고조선을지나 삼한시대로 들어 오면서 한반도에는 기록상으로는 철기문화가 확인되었다. 철기에 대한 실증적인 유적, 유물이 없어 검증하지 못 한 채로 남아있었는데 창원 성산패총의 발굴로 이를 밝혀낸 것이다. 또한 한나라의 오수전이라는 화폐가 발견됨으로서 가야를 중심으로 한 국제교역도 활발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한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가 가져갔다. 물건을 사고 팔 때 모두 철을 사용하였으니, 마치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았다. 가야는 철을 낙랑과 대방군에도 공급하였다”는 기사도 있다. 금관가야는 2~3세기에 이미 덩이쇠를 생산하여 수출까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덩이쇠는 철기의 핵심 소재로 화폐기능도 병행한 것으로 보인다. 철 소재는 막대모양의 철부와 덩이쇠 등이 있는데 막대모양의 철부는 2~3세기대, 덩이쇠는 3세기 말부터 대형 목곽분에서 출토됐다. 유자이기(가시모양 철기)와 낫, 끌 등은 덩이쇠를 가공하면 만들 수 있다. 4세기부터 5세기 전까지 덩이쇠는 대성동 고분에서 가장 많이 발굴되었다. 덩이쇠를 다발로 묶어 목곽의 벽을 따라 놓거나, 바닥에 일렬로 깐다. 덩이쇠를 바닥에 까는 것은 묻힌 자의 재력을 상징하기도 했다. 대성동 고분 목곽묘에서는 덩이쇠 외에도 철로 만든 갑옷과 투구, 대도와 검, 투겁창, 화살촉 등이 출토됐다. 또한, 대형의 굽은 칼과 창도 나타났다. 고대 철제갑옷과 투구는 철기 단조기술의 진수를 보여 주는 물품이다. 갑옷과 투구는 적당히 얇고 가벼운 동시에 방어목적에 충실하고 착용한 사람의 권위를 과시해야 하는 등 당시 철기 제작의 고도기술이 집약된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갑옷들은 주로 가야와 신라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갑옷에는 판갑옷과 비늘갑옷이 있다. 긴 철판을 이어 만든 판갑옷은 가야와 신라에서 개발한 것으로 보고 있다. 비늘갑옷은 소찰(비늘 쇠조각)을 엮어서 만들었으며, 이는 판갑옷보다 활동성이 좋고 방어력이 뛰어나다. 금관가야의 판갑 옷은 11~15매의 철판을 쇠못(리벳)으로 연결한 것인데, 대성동 2호 판갑에서는 고사리 문양이나 새 문양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4세기 금관가야의 비늘갑옷은 소찰만 허리에 두르고 위는 나무나 뼈, 가죽 등 유기질 갑옷과 상반신 전체를 소찰로 두른 것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리고 목을 보호하는 갑옷도 같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성동 고분에서는 판갑과 비늘갑옷이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많지만,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판갑옷을 여러벌 묻은 것이 특징이다. 이 고분군들에서도 갑옷과 함께 도(刀)와 검(劍), 창, 화살촉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대성동 제39호분 철제 목가리개 대성동 고분에서는 말갖춤새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금관가야에 는 말갑옷으로 무장한 기마무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인간에게 길들여진 이래 부와 군사력의 척도였다. 말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한 각종 말갖춤새를 개발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말을 제어하기 위한 재갈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말에 오르기 위한 발걸이와 안장이 개발되었고, 전투 시 말을 보호하는 말 갑옷과 말 투구도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말을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금이나 금동, 청동 장식도 개발되었다. 4세기대 금동으로 만든 말갖춤새가 다양하게 출토된 곳은 대성동 고분군뿐인데, 대성동 91호와 70호에서 출토된 말갖춤새는 북방유목 민족에으로 부터 온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철제 품 외에도 대성동 고분군의 최상위 지배층 묘에는 살포(농기구)와 U자형 삽날 등 농기구와 끌과 새기개 등 공구류, 쇠도끼등이 묻혀 있다는 점에서 금관가야는 가히 철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발달 된 철 기술을 바탕으로 금관가야는 중국과 왜를 잇는 남해 해상교역로를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철을 수출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강성한 국가단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